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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금속업계가 존재하기 위해서는 두 개의 바퀴 축이 필요하다. 한 바퀴는 당연히 금은상 즉 소매상이고 다른 한 바퀴는 디자인과 제조를 담당하는 세공이라는 축이다. 

(사)한국귀금속중앙회에(전. 금은상 연합회)는 지역마다 친목회나 지부모임이 있다. 예전 고물상 영업법이 있었을 때는 귀금속상이 경찰서장으로부터 고물상 영업허가를 받아야 하였기에 경찰서의 관리 감독을 받았고, 금은상들은 자연스럽게 귀금속중앙회ㅇㅇ지부라는 모임이 구성되었다. 

 

이들 지부는 지방마다 현안을 논의하고 친목을 다지며 가격덤핑 대책회의를 하였다. 간혹 절도나 강력 범죄가 발생하면 귀금속상은 장물을 취급할 우려가 있으므로 장물품표를 회람하면서 당국에 적극적으로 협조하였다. 

 

금은상들은 어차피 수평적 조직이고 서로 경쟁 관계이기도 하다. 따라서 각 금은상 사장님끼리는 연배나 상점의 연륜을 겉으로는 존중하지만, 실질적으로는 1점포 1표를 행사하는 이익단체이기도 하다. 지방에 따라서는 아주 돈독한 관계를 유지하는 곳도 있고 어느 지방은 한두 점포의 독자 행동으로 가격 조정과 휴일 조정에서 서로 반목하고 질시하는 예도 있었다.

 

이에 반해서 세공인의 세계는 거의 도제(徒弟)식 기술 전수가 이루어져 기술인 간에는 수평적이면서도 수직적 인연으로 자연스럽게 선후배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그래서 세공인끼리는 한 직장에서 근무하지 않았더라도 업계 입문 시기부터 누구의 문하생이냐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선배님, 후배님 하는 호칭으로 부르게 된다. 이 룰에는 서울과 지방의 차이 없이 아무개 공장 또는 아무개 선생의 제자냐에 따라 계보가 정해지고 처음 인사를 나누더라도 서로 친밀감을 느끼고 동지적 유대 관계가 형성된다. 

 

1980~90년대에만도 (재)한국귀금속보석기술협회(이하 기술협회) 주최로 전국 세공기술인들의 체육대회가 연례행사로 치러져 하나의 축제로 정착했다. 그 후 캐스팅 기술 도입으로 세공공장이 대형화되고 주식회사가 되면서 자동으로 회사 단위 단합대회로 변하게 되었다.

 

이 변화의 특징은 세공이 분업화하면서 어떤 사람은 왁스 기술자로, 어느 사람은 광기사로, 조각사로 기능이 세분화 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기술인들은 귀금속 세공의 한 파트의 부속처럼 되어 버린 것이다. 예전에는 세공일에 처음 입문하면 선배들 잔심부름부터 시작해 광일을 배우고 철사 뽑는 일을 배운 다음 망치와 줄을 잡을 수 있었다. 

 

흔히 선배로부터 꼴밤을 맞으며 평반지 작업에 들어갔다. 처음 해 보는 작업에 실수를 안 할 수 없으니 적어도 눈물 밥 2~3년은 먹어야 반지다운 반지를 만들 수 있었다. 

 

금은상에 근무하는 직원들은 다른 금은방으로의 이직이 아주 드물지만, 세공인들은 이직률도 높았다. 대개 세공인들은 도제식 기술 습득을 하는데 세공공장마다 주 종목과 특기가 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정도 일을 배웠다 싶으면 그 기술을 필요로 하는 곳에 스카웃 되기도 하고 급료에 불만이 있으면 쉽게 이직하여 또 다른 분위기와 새로운 기능을 익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타지방으로의 이직률도 상당하였다. 이렇게 지방간의 인적 교류는 쉽게 기술 교류로 이루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이렇게 세공인들은 인적 교류를 통해 알게 된 비슷한 연배끼리 친목 모임을 시작하였는데 그 효시가 영우회(永友會)다. 남대문 지역의 세공 기능인과 명동의 몇몇이 처음 모인 것이 1960년으로 지금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고 계신 황갑주옹을 위시하여 김귀일(이하 존칭 생략), 안기열, 최주갑, 장영식, 김영만, 김창하, 우광주등 17명이었다. 

 

이 모임이 1967년 120여 명의 회원을 모아 귀금속가공연합회로 발전하고 이 모임은 귀금속업계 최초로 사용자(금은상)에 대한 공임 불만을 표출하였고 공장 문을 닫는 파업을 하여 소기의 공임 인상을 얻어 냈다. 파업 당시 회원들은 한강 둔치에서 축구를 하며 단합대회를 하였다. 

 

이 모임은 더욱 발전하여 1975년에는 (재)한국귀금속보석기술협회를 탄생시켰다. 기술협회에서는 전국 단위로 매년 세공인 체육대회를 하였는데 그 효시는 한강 둔치에서의 축구대회였다.

 

기술협회와 별도로 개인 친목 단체인 영우회의 취지를 찬동하는 사람들이 더욱 늘어나서 같은 해(1975년) 5월에 명동, 종로 2가, 종로 4가, 남대문에서 세공공장을 운영하거나 수석 세공사로 있던 분들이 2차로 영우회를 확대 개편하게 되었다. 

 

이때의 회원들은 자타공인 귀금속 세공 업계의 중진 인사들이었다. 입회 자격은 1942년생에서 1936년생 사이로 하였다. 1936년생 그 이전분들은 선배님으로 호칭하고 자문위원이나 고문으로 초빙하였다. 

고문위원으로는 홍순성옹, 이갑성옹, 김일룡옹, 염창암옹을 추대하였고, 자문위원으로는 신권희 국립 서울산업대 교수를 추대하였다. 회장에는 황갑주, 부회장에 윤순기, 김영재, 장정운. 총무에 최주갑, 감사에 김귀일이 선출되었다. 회원은 총 65명이었다.

 

1986년도에는 이때가 영우회의 전성기로 재정도 넉넉해지고 회장단 선거 때는 열띤 선거운동을 하기도 하였다. 가장 특기할 것은 이해부터 스승의 날에는 선배님들을 모시고 경로잔치를 열어드린 것이다. 종로 2가에서 순금 공장을 하시던 영우회 고문이신 홍순성 선생님, 명동에서 누금 공예를 하신 김일용 선생님, 남대문의 이갑성 선생님, 염창암 선생님, 입사조각장 김철주 선생님 등 20여 분을 모시고 경로 사은 잔치를 시작하였다.

 

생존하신 분들이 50여 분 되었지만, 거동이 가능하신 분들만 모시다 보니까 매년 20여 분 정도 모시고 포천의 백운계곡, 우이동 계곡이나 도봉산 계곡의 산장에 모셔서 잔치를 베풀었다. 선배님들을 모시고 그저 주연만 베푼 것이 아니었다. 그분들에게서 듣는 업계의 숨은 뒷이야기와 기술적 조언을 듣는 아주 소중하고 뜻깊은 만남이었다. 

선배님들을 위한 사은행사를 거의 12년 가까이 하였다. 이후는 모두 작고하시거나 연락이 끊겨 더 모시지 못하는 아쉬움이 크다. 

 

현재 영우회 모임은 60여 년이 흘러 유명을 달리하거나 건강상 매월 20여 명 정도만 참석하는데 세월이 참으로 무상하다는 생각이 든다. 재미있는 현상은 회원들이 모두 한번 이상씩 회장, 총무를 역임하였다는 점이다. 그만큼의 세월이 흘렀다는 것이고, 현재는 최연장자인 박만복 씨가 회장을 이호선 씨가 총무를 맡아서 수고하고 있다. 

 

영우회 뒤를 잇는 후배들 모임은 ‘장맥회’가 있다. 장맥회는 기술협회의 지부장이나 임직원을 역임했던 분들이 주축인데 50여 명의 회원을 가진 정맥회원들이 현재 업계의 중추 역할을 충실히 하고 있다. 

 

또 하나의 세공인 모임으로는 기술협회 회원들이 결성한 ‘귀금속 장인협회’가 있는데 이들 역시 한창 왕성한 의욕을 지닌 업계의 젊은 희망으로 지금은 코로나로 중단되었지만, 체육대회와 야유회로 친목을 다지면서 기술 교류와 정보를 공유함으로써 귀금속업계의 장래가 촉망되는 그룹이다.


전 (사)한국귀금속감정원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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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2-11-04 15: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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