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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금속 업계의 뒷 이야기들 (7)




참혹한 6·25 전쟁을 치른 남한에는 모든 발전소와 산업 시설이 파괴되었고, 서울에는 당인리 화력 발전소가 유일하였다. 전력이 부족하여 대도시 가정에는 10W(10촉이라고 하였다) 전구로 밤을 밝혔다. 그나마도 전력이 저녁 6시에 들어왔다가 9시나 10시면 단전되었다. 여인숙에서는 가운데 벽에 구멍을 내서 전구 하나로 양쪽 방에 불을 밝혔다. 

 

사회 인프라인 전화망은 더욱 형편없었다. 전화 한 대 값이 집 한 채 가격이었다. 전화 가입권을 전화상에서 사고팔았는데 이들은 전화 가입권을 담보로 대출도 해 주는 금전 대부업도 하였다. 

 

전화 사정은 강남이 개발되던 1970년대 중반까지도 심각했는데 강남의 영동과 신사동에는 개인 전화 연락소가 생겨서 그곳에 전화를 걸어 몇 번지 누구네 집에 연락을 부탁하면 자장면 배달하듯 자전거로 그 내용을 전해 주기도 하였다. 

 

지방의 규모 있는 금은방에도 전화 있는 곳이 흔치 않았고, 영등포가 시외구간이라 시외요금을 적용하였다. 어느 약삭빠른 중상인은 부산과 대구 등의 전화국 교환수를 섭외하여 지방의 금 도매 시세를 매일 서울로 전화하게 하였다. 

 

그 중상인은 지방의 금 시세를 남들보다 일찍 파악하였으므로 서울 금을 매집하여 야간열차로 몇 시간을 달려 지방에 공급함으로써 큰 이문을 남기기도 하였다. 

전화국 직원은 요금 부담 없이 편법으로 서울에 전화를 거는 특권이 있었던 모양이다. 종로의 중상인은 허리에 금덩이를 차고 지방을 다녔는데 낌새를 챈 강도를 만나 큰 봉변을 당하는 예도 있었다.

 

1960년 4·19 혁명이 일어나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뒤이은 장면 정권은 당 내부 분열과 무능으로 사회 곳곳에서 날마다 시위가 벌어져 사회 혼란이 극에 달하였다. 심지어 초등학생들도 거리로 나와 어쭙잖은 주장을 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혼란상은 다음 해 5·16 군사 쿠데타의 빌미가 되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공화당은 국가정책을 국가재건과 경제부흥에 집중하여 모든 정책을 수출과 달러 획득에 두었고, 국민에게는 근검절약과 자조, 자립정신을 강조하였다. 

금은방은 사치품과 장물 취급 업소로 인식되어 여러 가지 규제가 뒤따랐다. 도둑질한 물건을 팔 수 없어야 도둑이 없어진다는 일제강접기의 논리로 1965년에는 ‘고물상 영업법’을 제정하였다. 따라서 신원조회를 거치고 경찰서장의 허가를 득해야만 금은방을 차릴 수 있었다. 고물 영업법에는 고물상 종류가 15종이나 되었는데 경찰의 장물반과 경제반, 외사계 형사들이 고물상 대장을 점검한다고 금은방에 수시로 드나들었다. 

 

그들이 들이닥치면 맨입으로 보낼 수가 없었다. 사회 분위기가 그렇고 그런 시대였고, 서로 공생할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 

 

고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밥이 되어라”라고 명언을 남겼지만, 금은방은 그들의 밥이었다.

경찰보다 무서운 것은 세관이었다. 금은방에 진열된 빨갛고 파란 반지는 유리가 아닌 이상 당연히 국산이 아니었다. 국내 생산은 오직 백수정, 연수정, 자수정밖에 없었기에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비싸지도 않은 색깔 있는 보석(잡석이라는 준보석)을 트집 잡아 세관으로 데려갔고, 조금 비싼 물건들은 어김없이 출처를 묻는 강압 수사를 당해야 하였다. 금은방이 밀수 온상으로 몰린 것이다. 출처와 공급자를 실토하라는 것이었다.

 

금은방 수십 년 경영한 사람치고 장물법이나 관세법으로 단속되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만일 아무런 전과가 없다면 아마도 운이 아주 좋았거나 아니면 특별한 배경이 좋았거나 그도 아니면 사업이 지지부진했을 터였다.

 

강도, 절도사건만 터지면 경찰서 강력반이 금은방의 고물상 대장을 뒤졌다. 물론, 이렇게 해서 강절도사건을 해결한 예가 없지는 않았다. 이 경우는 금은상 쪽에서 수상한 물건을 신고하여 범인 검거에 협조한 덕분이었다. 유신체제에서는 더욱 심해서 무소불위 막무가내 정권이기도 했지만 적발당하면 당해 물품을 압수당하고 벌금과 추징금을 부담하고 실형까지 살아야 했다. 

 

이러한 금은방의 약점을 잘 아는 시경의 김 아무개 형사는 수시로 금은방을 다니며 돈을 갈취하다가 파면당하고 결국 법정에 선 경우도 있었다. 어떤 전직 경찰관은 현직 때의 경험으로 금은상들을 겁박하였고, 후환이 두려운 금방에서는 점심값을 쥐어주기도 하였다.

 

서울의 귀금속 거리는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시외버스 종점이나 역 인근에 형성되어 있었다. 영등포의 귀금속점은 기차역과 가까운 영등포 시장에 형성되었고, 신당동의 중앙시장 대로변, 마장동 시외버스 종점, 청량리역 대왕 코너와 청량리 로터리 주변, 불광동 시외버스 종점등에 금은방이 자리했다. 

 

중심 상권으로는 종로의 화신 백화점 내의 금은부와 종로 2가에서 동대문 방향으로 보금장, 금화상회, 보광당, 삼성당, 경화당, 서보양행, 보석장, 보신양행, 대명공사 등 이름난 대형 귀금속상들이 있었다. 

명동 입구와 미도파백화점(현 롯데백화점) 그리고 신세계 백화점 내에도 번듯한 금은방이 있었다. 

 

당시 백화점들은 정문 입구에 금은 부를 배치하여 백화점 분위기를 한껏 고조시켰다. 번쩍이는 금은 장신구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명동 입구에는 중앙우체국 앞의 정금사를 비롯해 한창, 미금사, 사고파, 삼일사등이 명동 입구를 화려하게 장식하였다. 

 

남대문 시장 쪽에는 홍보석, 중앙사, 남미사, 천광사, 보원장 등이 영업하였다. 종로의 금풍상회와 명동의 서울금은상회, 영창당등은 전국을 상대로 금은 도매업을 하였다. 

 

서울 외곽 금은방 중에는 특히 영등포 상권이 번창하였는데 영등포 방직 공장이나 구로동 산업단지 근로자들이 주 고객이었다. 그들이 명절에 고향갈 때 아버지 선물로 국산 시계를 사고, 어머니 선물로는 금반지, 금목걸이를 마련하였다. 그때 영등포 금은방에서는 명절 때가 되면 국산 시계가 하루에 50개, 100개씩 불티나게 팔렸다고 한다.

 

(사)한국귀금속감정원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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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2-05-13 14:4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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