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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금속 업계의 뒷 이야기들 (6)




참혹했던 6·25 동란이 지난 휴전 직후의 서울 풍경은 참혹하기 짝이 없었다. 지금의 우크라이나보다 더 비참했다. 사람들은 긴 막대기에 꼬챙이를 박아서 길바닥의 담배꽁초를 주워 이를 모아서 봉지로 팔기도 하고, 커다란 망태기를 등에 메고 길거리의 휴지나 고철과 고물들을 수집하며 하루하루를 연명하였다. 

 

생활이 어려워 좀도둑이 활개를 쳤는데 빨랫줄의 옷가지는 물론 자질구레한 가재도구들이 없어지곤 하였다. 그중 부엌 찬장 속의 은수저를 제일 많이 노리기도 하였다. 

집을 지으면 철조망도 못 미더워 담장 위에 깨진 유리병 조각을 촘촘히 박아 넣었다. 참으로 살벌한 풍경이었다. 이렇듯 발버둥 치던 시절이 그렇게 먼 옛날 이야기가 아니고 바로 우리 세대가 모두 겪었고 보았던 것이다.

 

휴전 직후부터 60년대 초반까지 골목 사회 풍경으로는 속칭 ‘가방쟁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채권장사’라고도 불리던 중년 남자들이 오래된 가방에 약방 저울을 가지고 다니면서 골목마다 “금이나 은이나 채권삽니다”하고 외치고 다녔다. 

이들은 그래도 얼마 정도의 장사 밑천을 가방에 챙길 수 있는 사람들이었고 금이나 은, 시계나 골동품에 관한 상식과 채권의 이자 계산 등 경제 상식도 밝아야 했다. 채권 장사들은 이렇게 장사를 하여 돈이 좀 모이면 점포를 얻어 본격적인 금은방을 개업하기도 하였다. 

 

점포를 낼 형편이 안되는 사람들은 금 도매상과 소매상을 연결하는 중상인(속칭 나까마. 거간꾼)으로 생업을 이어갔다. 

중상인은 새로 생긴 직업이 아니고 조선조 500년을 지탱한 국가의 한 근간이기도 하였다. 조선조의 한양성은 동대문에서부터 서대문까지 일직선으로 곧게 뚫린 56척(약 17m) 너비에 15리(약 6km) 길이의 종루대로(종로)와 다시 종루대로에서 정궁인 경복궁의 광화문까지 폭 190척(약 58m)에 달하는 육조 거리가 있었다. 인구는 약 20만 명가량이 살았다. 종루는 보신각 종이 있는 거리라는 뜻이었다.

 

한양 도성 안의 중심지인 종루 네거리(지금의 종로 2가)에서 배오개 다리까지 (종로 5가) 여섯 시전(市廛. 시장)이 자리하고 있었다. 

중국 비단을 거래하는 ‘입전’, 국산 비단을 판매하는 ‘명주전’, 무명 옷감에서부터 세금으로 걷히는 군포목 따위를 거래하는 ‘면포전’, 모시를 거래하는 ‘저포전’, 다양한 종이와 잡화를 취급하는 ‘지전’, 그리고 내어물전과 서소문 바깥의 외어물전을 합친 ‘어물전’까지, 모두 여섯 집단 시전(市廛)을 통칭해 이른바 ‘종루 육의전(六矣廛)’이라 불렀다.

 

종루 육의전은 조선 건국에 때맞춰 태종 12년(1412)에 처음으로 시전을 연 이래 무려 500여 년이 넘도록 거의 매일같이 열렸다. 

더구나 이러한 시전들은 여러 대를 이어오며 한 종류의 상품만을 전문으로 취급하게 되었다. 육의전의 시전들은 동일하게 길쭉한 기와집으로 점포 정면 앞칸에 상품 진열대가 있고 뒤편에 여러 작은 방으로 나누어진 상품 저장고가 있었다. 육의전은 주인이 직접 손님을 응대하지 않고 여리꾼(소개꾼)이 오가는 사람을 끌어들이면 거간꾼이 흥정을 성사시켜 구전을 챙기는 것이었다. 

 

이처럼 종루 육의전의 시전 상인들은 독점적으로 일반 백성에게 갖가지 상품을 판매하는 한편, 궁중과 관청에 수요품이나 생필품을 공급하고 일정한 국역을 부담해야 했다. 

이들이 부담해야 할 국역은 상세(상업세)와 공랑세(육의전 건물세)를 부담하고, 그러한 대가로 독점적 상업 활동을 허락받았다. 

 

조정에서는 종루 육의전으로부터 필요한 국역을 안정적으로 공급받는 대가로 그들에게 자금을 대여해주기도 하고, 때로는 임금의 사금고인 내탕금을 육의전 상인들에게 강제적으로 고리채 돈놀이를 하였다. 

그 특혜로 궁중에서는 이들의 상권을 보호하고자 그들 이외의 모든 상업 활동을 불법 행위로 여기고 금지한다는, 이른바 ‘난전(亂廛)’을 금지하는 ‘금난전권(禁亂廛權)’이라는 별도의 특권을 시전 상인들에게 부여했다.

 

전국의 상권과 물류는 보부상(褓負商)이 전권을 부여받아 국초이래 굳건한 조직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보부상은 이성계가 건국초 인연을 맺은 백달원에게 전권을 부여한 전국적 조직이다.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나라가 거덜날 뻔하였다. 궁핍한 백성들의 처지를 더 이상 외면할 수만은 없게 된 정조는 1791년에 식유민천(食有民天), 곧 백성들의 기본 호구는 충족시켜야 한다는 일념에서 일반 백성이면 누구나 장사를 할 수 있도록 도성 안의 종루 육의전을 제외한 나라 안 어디에서나 금난전권을 폐지하게 하였다.

 

그 결과 유일하게 허락받은 종루 육의전의 시전 말고도 한강 변에 상권을 이룬 경강상인들과 개경 상인들 ‘사상(私商)’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또 이런 사상들이 증가하면서 왕조 말기의 조선 상계는 마침내 독점 체제에서 벗어나 경쟁 관계를 이루게 되었고, 결과적으로 육의전의 시전 상인들이 몰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 시대 이야기는 이쯤하고, 귀금속 중상인 중엔 점포 없이 자기 자본으로 지방과 변두리 소매상을 다니면서 고금을 매입하거나 분석비를 받고 덩어리 금으로 교환해 주기도 하였고 준보석을 유통하였다. 

또, 소매상에서 주문한 물건을 배달하여 주고 약간의 수고료를 받기도 하였다. 소매상에게는 중상인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였다. 

 

당시 소매상인이 종로를 왕래하기엔 시간과 비용이 아쉽기도 하고 지방의 경우엔 교통편이 참으로 어려웠다. 부산에서 서울을 기차로 오려면 10시간 넘게 걸리기도 하던 때였다. 기차 편이 이러하니 버스 편이야 말해 무엇하랴...

중상인들은 소매상이 꼭 구하고자 하는 상품은 물론이고 특이한 디자인을 척척 찾아주거나 세공 공장을 연결해 주었다. 

 

또한, 소매상에서 되팔고자 하는 제품을 도매상에 연결해 처분해 주기도 하며 도매상이나 타지방의 중요한 영업 흐름과 소식을 전해주는 메신저 역할도 하였다. 

중상인의 역할은 여기서 끝나지 않고 점포를 소개하는 일도 하고 점원을 구해주는 인력 소개 등 다양한 중도매인 역할도 하였다. 

 

한때 80~90년대 호황기에는 종로 도매상 거리에만 수백 명이 넘는 중상인들이 활발한 영업 활동을 하였다. 이들 중상인들은 조합을 결성하고 사업자 등록을 하여 세금을 납부하면서 떳떳하게 사업을 하고 있다. 

 

또한, 중상인 들은 ‘중소기업중앙회’에 가입하여 적극적인 목소리를 내면서 귀금속상인의 권리를 옹호하고 주장하는데 많은 성과를 얻어내고 있다.

현재의 금은보석 계통 중상인이 조선조의 보부상 같은 역할을 하는 시대는 아니지만, 전국 유통망의 노하우를 갖고 있어서 중상인의 역할은 아주 중요하다.

 

조선 시대의 보부상은 우리가 흔히 짐작하는 그냥 떠돌이 보따리 장사꾼이 아니고 나라의 관청 조직만큼 결속력과 통제력과 막강한 세를 가지고 있는 현대의 노조보다 월등한 조직이었다.

중상인 조합이라는 중간 조직은 반드시 필요하고 중상인은 없어서는 안되는 사람들이다. 중상인의 정보를 종합하면 지금 무슨 디자인과 어떤 보석이 어느 연령대에서 유행하는지? 또 앞으로의 트랜드는 무엇이 될 것인지를 유추할 수가 있는 것이다. 중상인의 정보는 적극적으로 활용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이성재/ (사)한국귀금속감정원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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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2-04-20 17:4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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