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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로 병탄한 이후 총독부에서 진고개(지금의 명동 일대)를 일본인들의 주거지로 개발하고 남산에는 그들의 신궁을 세웠다. 그런 다음, 남산 아래에 화강석으로 된 미스코시(三越, 현 신세계) 백화점을 세워 조선 민중의 기를 꺾고 경성에 있던 일본인들의 탐욕과 허영심을 충족시켰다. 

    

   1930년대 이야기이다. 미스꼬시 백화점은 짙은 화장을 하고 기모노를 입은 여점원들을 입구에 도열시켜 분장한 미모를 뽐냈고, 90도 인사법으로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 무렵, 평안도 용강사람 박흥식이 평안도에서 지물(紙物)과 인쇄사업으로 자본을 만든 후 경성으로 올라와 지물을 직수입하여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 독점 공급함으로써 크게 성공하였다. 

    

   그는 사업을 하면서 금이 모든 화폐가치 중 가장 으뜸인 것에 눈을 뜨고 신태화가 운영하던 종로 2가의 화신 금은상회를 인수하였다. 그는 화신 금은상회를 리모델링하여 금은방을 더욱 크고 화려하게 개점하였다. 화신금은방을 경영하며 많은 돈을 모은 박흥식은 그 자리에 미쓰꼬시 백화점을 겨냥한 4층짜리 화신백화점 건물을 신축하였다. 

    

   화신 백화점에는 금은부와 주단포목, 수입상품 등으로 미스꼬시 백화점과 경쟁을 하였다. 그러던 중 1935년 1월 27일 화신백화점이 대화재로 전소하였다. 그는 요행히 화재보험으로부터 손해를 전액 보상받아 그 자금으로 백화점을 다시 신축하였다. 

    

   박흥식은 1937년 11월 11일 연 면적 3천 평의 지하 1층 지상 6층의 신식 건물을 완공하였다. 여기에 엘리베이터를 설치하여 국내 최고의 화려함과 첨단 시설을 자랑하였다. 

   경성 사람들은 화신백화점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6층에서 식사하는 것이 큰 자랑으로 알았다. 시골 사람이 서울을 오면 제일 먼저 남대문을 구경하고 화신 백화점을 구경한 다음 창경궁을 찾는 것을 서울 구경의 전부로 여겼다. 

    

   경성 또 하나의 백화점은 1938년 일본에서 양복점으로 재산을 모은 고바야시란 자가 세운 정자옥(丁子屋) 백화점이었다. 서울(京城)에는 미쓰코시((三越), 종로의 화신, 명동 입구의 정자옥이 3대 백화점이었다. 정자옥은 Chojiya의 음차(音借)라고 하는데 해방 이후 적산 건물로 1966년 5월 대농그룹(박용학)에 매각되었다. 

    

   대농그룹은 미도파로 개칭하고 백화점을 개점하여 큰 호황을 이루었다. 미도파 역시 매장 전면에 귀금속 점포를 1호부터 8호까지 배치하여 백화점을 들어서면 화려한 금 장신구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미도파를 발판으로 대농그룹은 면직물 사업과 전국에 슈퍼마켓 등도 운영하였는데 방만한 경영과 국제 석유 파동을 이기지 못하고 부도를 맞게 되었다. 그 후 1998년 롯데가 인수하여 롯데백화점으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부 수립 얼마 후 명동에는 코스모스 백화점이 들어섰다. 당시 국내 땅값 1위 땅에 재일교포 정규성(1909~1992)이 1970년 백화점을 신축하여 기세 좋게 출발하였다. 잘 나가던 코스모스 백화점은 계열사 코스모스 전자가 1991년 부도가 나면서 함께 부도를 냈다. 길 건너편에 초호화 백화점인 롯데가 새로 생긴 것도 코스모스 몰락에 한 몫을 보탠 것이지만 전자사업의 부진이 가장 큰 타격을 준 것이다.

    

   코스모스에도 금은방이 여럿 있었지만, 백화점의 부도로 보증금을 떼이면서 모두 명동 지하상가나 남대문 상가 등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코스모스는 그 후 여러 주인의 손을 거치다가 현재는 Noon 스퀘어에서 자라(Zara) 등 패션몰과 영화관으로 운영되고 있다. 

    

   명동 입구의 상가도 국내 상권으로는 최고 요지여서 금은방이 여럿 자리하고 있었다. 한창, 삼일사, 사고파, 미금사, 보금사. 정금사 등이 이름을 날렸다. 미도파 뒤편에는 종로 2가의 경화당이 이전하여 성업을 이루어 나중에는 익산 귀금속 단지에 ‘코리아 다이아몬드’를 세워 국내 최초 다이아몬드 연마를 시작하는 기염을 토하였다. 

    

   최대의 재래 상권인 남대문 시장 전면에도 홍보석, 북성공사, 중앙사, 보원장, 남미사, 천광사 등이 시장을 장식하였다. 그러나 주차장이 없어 국민 형편이 좋아지면서 매출이 급격히 줄기 시작하였다. 역시 주차시설이 없는 명동 입구 금은상들 일부도 명동 지하상가와 롯데백화점 일번가로 입주하면서 금은방 지형이 대폭 바뀌었다. 

    

   재일교포 신격호 회장이 일본에서 껌을 비롯한 제과업으로 크게 성공하고 국내에 자본을 들여와 명동 건너편 소공동에 1979년 롯데호텔을 지으면서 부속 건물로 백화점을 차린 것이 롯데백화점의 시작이다. 

    

   소공동 본점의 지하 1층 매장이 넓게 보이는 것도 백화점과 롯데호텔 아케이드가 함께 있어서이다. 

   롯데 백화점은 86아시안게임 및 88올림픽 공식 백화점으로 지정된 후 급격히 사세가 확장되었는데 1988년 잠실 롯데월드와 그해 1월 말에 중구 소공동 본점 신관을 재확장, 개관하였다. 

    

   롯데 백화점 개장 당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1층 로비에 설치한 순금 8관(30kg)으로 만든 박해도 匠人(장인)의 작품인 순금 거북선의 위용이었다. 이 순금 거북선은 여러 사정으로 현재는 철거하여 롯데 호텔에 보관되고 있다.

    

   또 하나 백화점으로는 현대건설의 세운상가를 관리하던 금강개발(정주영 회장의 3남 몽근)이 압구정 현대아파트 단지에 1985년 12월 오픈한 현대백화점이다. 강남의 요지에 세워진 현대백화점은 뒤늦게 출발했지만, 국내 최고의 재벌 계열로 단숨에 롯데. 신세계와 나란히 위세를 떨쳤다. 

    

   이곳에도 유수의 금은 보석상이 자리 잡아서 강남 사모님들의 수요를 충족시켰는데 소리소문 없이 사업이 번창하고 있다고 한다. 이상하게도 우리나라 사모님들은 본인 돈 쓰면서도 보석 수요 만큼은 감추고  들어내기를 꺼려하고 있다. 

    

   핸드백이나 옷차림, 시계 같은 것은 자랑스레 내보이면서 보석은 숨기는 것도 우리나라만의 특이한 기현상인 것이다. 아마도 보석 귀금속은 세금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자금 출처 등에서 많은 약점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한국귀금속감정원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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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2-06-28 18: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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