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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 길 물속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속담이 있다. 여기서 한 길은 얼마를 일컫는 것일까? 

 

중국을 평정한 진시황이 제일 먼저 정비하고 통일시킨 것이 도량형이었다. 그만큼 도량형은 백성의 삶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나라의 삼국시대와 고려 시대에도 도량형(度量衡) 규정은 있었다. 그러나 도량형 규정은 고을마다 차이가 있었다. 본래 나라가 혼란하면 가장 문란해지는 것이 됫박과 저울이다. 그래서 됫박괴 저울을 속이면 3대가 빌어먹는다는 속담까지 생긴 것이다. 

 

조선 건국 초기 심각하게 문란해진 도량형(度量衡)을 세종대왕이 아악의 음률을 훌륭하게 정비한 박연을 시켜 서민들의 실생활에 밀접한 도량형을 정비하게 하였다. 

박연은 곡식 중에서 비교적 크기가 고른 기장을 기준 삼았다. 박연은 기장 중에서도 중간 크기를 골라 100개를 나열하여 그 길이를 척이라 하였다. 지금의 34.48cm였다. 

 

나중 척(尺)을 자 또는 치라고도 부르고 일반에서는 길이라고도 칭하였다. 속담에서의 한 길이란 1자 즉 한치를 말한 것이었다. 열길 즉 10자를 1장이라 했는데 1길이면 약 3.45m이고, 1장의 1/10을 1촌, 1촌의 1/10을 1푼이라 했다. 

그러니까 속담에서 3.5m 물속은 알아도 35cm쯤의 사람 속은 가늠이 어렵다는 뜻이다. 

 

부피는 홉, 되. 말, 섬으로 규정하였고 무게는 관(貫), 근, 양, 돈으로 호칭하였다. 박연은 기장 1,200알이 들어가는 관의 부피를 1작(勺)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100작을 1되, 1,000작을 1말, 15말을 작은 섬, 20말을 큰 섬으로 정했다.

 

조정에서는 이같이 규정하고 각 지방 관아에 지침을 내렸다. 또한, 지방 관리를 감사하는 암행어사에게는 2개의 놋쇠로 만든 유척(鍮尺)이 주어졌다. 하나는 죄인을 매질하는 태(笞)나 장(杖) 등의 형구 크기를 통일시켜 장형(杖刑)을 남용하는 것을 방지하는 데 쓰였고, 하나는 도량형을 통일해서 세금징수를 고르게 하는 데 쓰였다. 

 

암행어사가 도량형을 감찰했던 것은 지방 수령의 자의적인 세금징수를 방지하기 위함도 있었다. 

조선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세종 때 만든 표준 ‘자’가 거의 다 사라져 탐관오리들이 눈금을 멋대로 조작해 백성들에게서는 세금을 더 걷고 조정에는 덜 내는 방식 등으로 이익을 편취하였다. 

 

형벌의 기준이 되는 매의 길이도 제각각이어서 영조는 유명무실화된 도량형을 통일시킬 정확한 기준이 되는 눈금을 만들고자 하였다. 당시 최고의 기술을 지녔던 최천약을 시켜 정교하고 변형 없는 ‘놋쇠’를 사용해 표준 자를 만들었다. 사각형의 쇠막대에 종류와 쓰임새가 각기 다른 다섯 종류의 눈금을 새겨 넣은 다용도 자를 만든 것이다. 

 

이를 경신년에 만들었다 해서 경신척(庚申尺)이라 했는데 길이 246mm, 폭 12mm, 높이 15mm의 4각 기둥의 각 면에 5개의 다른 눈금을 각각 새겼다. 경신척은 눈금의 크기에 따라 용도를 달리하였다. 

 

악기를 만들 때는 황종척(黃鐘尺), 의복 재단용으로 포척(布尺), 건축물이나 성곽을 축조할 때 사용하는 영조척(營造尺), 천문기기 제작 등 측정 기구를 재는 주척(周尺), 왕실 사용의 그릇이나 제례 등 종묘 제사와 관련된 일에 사용된 예기척(禮器尺) 등 쓰임에 따라 다르게 불렀다. 이로써 조선 후기의 사회 질서가 잡힌 것이다. 

 

그 후 1894년 고종 31년에 일본을 본떠서 국제원기인 1m 원기와 ㎏ 원기를 도입하고 1905년 (광무 9년, 고종 42년) 3월 법률 제1호로 ‘도량형법’을 제정 공포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1959년 국제미터협약기구에 가입하고, 1961년 8월 상공부에 ‘중앙계량국’을 설치하였고 1964년에는 척관 법을 폐기하고 완전히 미터법으로 통일시켜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53년 7.27일 휴전후 정부 부처가 환도하고 서울 사람들이 속속 귀경하였다. 예전 금은방을 했던 이들은 귀금속 상식을 살려 길거리에 사과 궤짝 같은 좌판을 벌이고 손님들이 갖고 오는 금·은가락지, 은비녀나 시계 등을 매입하여 더 큰 도매업자한테 넘기곤 하였다. 

 

이때의 금 저울은 한약방의 한약 저울을 사용하였다. 한약재 무게를 달던 들저울이다. 저울대는 새끼손가락 보다 약간 가늘고 약 25~30cm 정도 길이의 나무 막대인데 앞쪽 약 15cm쯤 위에 고리를 달아 손잡이로 매듭 끈을 매었다. 

 

저울6.jpg

 

맨 앞쪽 밑으로는 가는 고리 철사 세 가닥을 늘려 끝에는 약을 담는 얇은 쇠 접시를 매달아 놓았다. 줄을 매단 손잡이 고리에서 조금 떨어진 곳부터는 눈금으로 작은 홈을 9개씩을 새긴(푼을 표시) 다음에는 10번째에 돈(3.75g 重)을 새긴 조금 굵은 선이 나무 막대 끝까지 순서대로 새겨져 있다. 

 

나무 막대에는 명주실에 매단 한 돈짜리 추를 매달아서 그 추가 어디까지 가서 수평을 이루느냐에 따라 접시에 놓인 물건의 무게를 잰 것이다. 이 돈 추는 일제강점기에 1돈을 3.75g으로 정했기에 일본과 우리나라는 1돈이 3.75g이다. 

 

중국이나 홍콩과 동남아 제국은 예전 관습대로 1돈은 3.7429g이어서 약 0.998돈이다. 그 때문에 소비자들이 홍콩이나 베트남, 태국 등 동남아에서 10돈 금을 사오는 분들이 한국에 와서 달아보면 2리가 빠지는데 공연히 우리나라 금은방이 오해를 받기도 하였다. 

 

한때 금괴 수급이 모자라서 밀수금이 들어오면 100돈 금괴가 2푼이 빠졌는데 이런 사실을 모르는 금은상 중에는 이 2푼을 은으로 채워서 팔기도 하였다.

 

이 한약방 저울은 조선 시대부터 한약국에서 사용하던 것으로 돈 추만 일제에 의해 1돈을 3.75 그램으로 개조된 것이다. 이 한약방 저울은 운용하는 주인의 손끝으로 추를 놓는 기술에 따라 1~2푼씩 야로를 부릴 수가 있었다. 호랑이 담배 먹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이 저울은 휴대가 간편하여 한동안 금 저울 역할을 하였다.


1960년대 후반 국내 제작으로 평 저울이 보급되었다. 이것은 한쪽 접시에 금을 놓고 다른 접시에 추를 올려 중앙의 눈금 게이지가 가운데 정확히 올 때 무게를 측정하도록 하였다. 이 저울은 g 추를 사용했는데 비교적 정확해서 전자저울이 상용화되기까지 오랫동안 이용하였다.

 

(사)한국귀금속감정원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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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2-04-01 18:0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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