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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양 도읍을 처음 건설할 때에는 청계천은 자연 河川으로 실개천 수준이었다. 중학천으로 흐르는 북악산 물과 인왕산에서 발원한 물이 광교 근처에서 합류하여 청계천이 되었는데 비가 안오면 거의 건천 수준이었다. 그래도 광교 다리와 수표교 다리를 놓아 한양의 남북 교통을 유지하였다. 

    

   몇 년에 한 번씩 장마가 지면 광화문 일대와 종로통이 물바다가 되므로 영조 때에 빗물 처리와 하수처리를 위해 아주 크게 개천을 파서 현재의 직선화된 하천 구간이 되었다. 그 후 일제강점기에 복개 계획을 세웠으나 태평양 전쟁으로 중단된 것을 자유당 초기 복개 공사를 시작하여 4.19 발발 직전 청계6가까지 완공하였다. 약 50m 폭으로 새로운 복개 도로가 생긴 것이다.

    

   중세시대의 런던에서도 템스강이라는 큰 물줄기가 있었지만 각 가정에서 나오는 모든 오·폐수를 그냥 길가에 내다 버려서 각종 수인성 질병이 발발하였다. 

    

   또, 그 유명한 파리의 베르사유 궁전에서도 화장실이 없어서 궁정 안의 아무 곳에서나 용변을 보았다고 한다. 그 결과 여인들은 철사를 넣어서 통 큰 치마를 입고 양산을 가지고 다니면서 용변 시 얼굴을 가려야 했다. 워낙 여기저기 용변을 본 터라 어쩔 수 없이 남녀 불문, 굽 높은 하이힐을 신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하나, 중세의 유럽에서는 목욕하면 피부가 약해진다는 속설로 목욕을 기피 했다는데 체취가 너무 심하니까 이를 커버하기 위해 향수가 발전하였다는 것이다. 그건 그렇고….

    

   조선조에서는 지금의 예지동, 청계 4가 일대를 배오개라고 하였는데 배나무골이라고도 하였다. 배오개 바로 옆의 방산(芳山)은 청계천을 준설할 때 나오는 흙더미를 쌓아서 동산이 되었는데 그곳에 나무들을 심어서 방산이라 불리던 지명이다. 이곳 방산을 조선조 말에 흙산을 없애고 마전(馬廛)시장과 채소시장 기능을 하도록 하였다. 채소는 본래 신설동 근처와 답십리 벌판에서 기른 남새(채소)를 동대문(興仁之門) 밖에서 거래하였었다. 

    

   그 채소전에 얽힌 서글픈 역사 이야기는 익히 알려져 있다. 세조에게 쫓겨난 단종 왕비인 정순왕후(定順王后)가 단종이 사는 영월, 동쪽을 바라보며 매일 큰절을 하고 기도하기 위해 낙산(駱山)에 거주하였는데, 서인(庶人)으로 내쳐졌으므로 조석거리가 없었다고 한다. 이를 딱하게 여긴 채소전 아낙네들이 돌아가면서 끼니와 채소를 무상으로 대 주었다고 한다. 

    

   정순왕후는 18세에 궁궐에서 쫓겨나와 82세까지 살았다고 하는데, 정순왕후는 세조가 얼마나 잘 사나 보자는 일념으로 이를 악물고 그렇게 오래 살았다는 것이다. 그 후 채소전은 임진왜란 때 명나라의 강권으로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 사당(東廟)을 짓고 제사를 지내며 왜군을 물리쳐 주길 기원하였다고 한다. 

    

   그 때문에 자연적으로 채소 시장이 동대문 안으로 들어와 배오개까지 들어온 것이다. 그렇게 배오개 시장은 종루(鍾樓) 시전의 포목, 유기. 피륙, 생필품 상점들과 어우러져 제법 큰 채소 난전으로 발전하였다. 

    

   지난 호에 언급하였지만, 이곳에 고종황제의 명으로 근대식 광장시장이 들어와서 배오개 이름은 잊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역사는 돌고 돌아 이명박 시장이 청계천을 복구하면서 다리를 놓아 배오개 다리 이름이 다시 소생하게 되었다. 

    

   6·25 사변으로 나라에 다시없는 상처를 남기고 성과 없는 휴전을 맺으면서 서울이 수복되었다. 피란지에서 귀경한 대다수 시민은 건물이 거의 파괴되어 움막을 짓고 생활하였다. 그래도 자기 집터가 있는 사람들은 제 집터에 얼기설기 보금자리를 꾸렸지만, 이북에서 내려온 실향민이나 무작정 상경한 지방 사람들은 땅임자가 없는 청계천 변에 나무 기둥을 세워 판자로 움막을 짓고 미군 부대나 우리나라 군대에서 유출된 군복을 검정색으로 염색하는 작업으로 연명하였다. 염색한 군복이 서울 사람들의 일상복이 된 것이다.

    

   광장시장 상인들은 폭격으로 뼈대만 남은 시장에 다시 벽돌을 쌓아 가면서 장사를 시작해 시장기능을 살리기 시작하였다. 월남인들은 광장시장과 서울역, 남대문 시장, 청량리 역전, 영등포 역전 주변에 노점을 벌려 물물 교환도 하고 피난 시 챙겨 왔던 집안의 살림살이나 소장품을 내다 팔기도 하며 살아갔다. 

    

   어떤 사람들은 대나무로 얽은 망태기를 메고 고철을 줍거나 폐지를 주워 겨우 입에 풀칠하였다. 부끄러운 역사이지만 미국에서 보내주는 탈지분유나 구제품이라 부르던 헌 옷가지가 아니었으면 생존하기가 쉽지 않았던 때이다.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무리 과거가 부끄러워도 이를 반추하고 되새김으로서 앞날을 다짐하고 기약하자는 것이다. 

    

   작금의 우크라이나 사태를 보면 그들 형편이 6.25 때보다는 양반이란 생각이 들 정도로 6.25 당시의 우리나라 사정은 더없이 참혹하였었다.

    

   청계천이 복개되면서 광장시장의 기능이 크게 발전하였다. 광장시장의 청계천 쪽 북서쪽 모퉁이에는 천일 백화점이라는 독립 상가가 있었다. 이 천일 백화점에도 몇몇 금은방이 있었고 천일 백화점은 우리나라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큰 사건을 목격하게 된다. 

    

   1960년, 자유당이 3.15 부정선거를 저지르고 마산에서 김주열 군이 최루탄이 박힌 시체로 발견되면서 경향 각지에서 시위가 촉발되었다. 그 시위는 급기야 서울로 불길이 옮겨붙었다. 

    

   부정선거 한 달 후 4월 18일 시청 옆 국회의사당 일대에서 3.15 부정선거 규탄 대회를 마치고 귀교하던 고려대학교 학생들을 임화수와 동대문 정치 깡패 일당 60여 명이 중무장으로 습격하여 대학생 1명이 숨지고 기자 포함하여 46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다음 날 4월 19일, 제자들의 피투성이 처참한 모습을 본 모든 교수가 시위에 대대적으로 참여하고 시민, 학생 등 서울에서 3만 명 이상이 시위에 참여하였다. 

    

   그날 경찰의 발포로 130여 명이 목숨을 잃었고 부상자 또한 1,000여 명에 달하였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4.26일 하야를 발표하여 자유당 정권이 종말을 맞이한 것이다. 민심 이반의 당사자였던 이기붕은 처와 자식까지 일가족이 청와대에서 권총 자살함으로써 생을 마감하였다.

    

   4.19를 결정적으로 촉발한 천일 백화점 앞(예지동 청계 사거리) 고대생 습격 사건 현장에는 이 사건의 아픈 역사를 일깨우는 어느 하나 표식이 없다. 세상이 참 너무 무심하고, 과거를 너무 쉽게 망각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또 하나, 배오개 거리의 예지동은 재개발 사업으로 이곳의 모든 건물이 흔적 없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 또한 우리 귀금속 업계가 40년 가까이 귀금속, 시계 도매 시장으로 이름을 날리던 곳으로, 어떤 방식이든 흔적을 남기고 기억할 수 있는 장소를 하나쯤 만들었으면 좋겠다. 

    

   언젠가 을지로 3가의 냉면집을 보존하느니 마느니 말들이 많았는데 하물며 1,000여 점포가 있었던 귀금속 보석 거리를 그냥 갈아 엎어서야 되겠는가? 

   우리 귀금속 단체에서 서명 운동을 벌여서라도 현대사의 한 분수령이었던 고려대생 습격 사건과 귀금속 거리의 역사적 상징물 설치를 제안하고자 한다.

   

   전 (사)한국귀금속감정원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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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22-09-26 18: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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