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 칼럼에서 국내 화폐개혁 내용 중 6·25 동란 당시 북한군이 위조지폐 사용으로 남한 경제가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는 내용이 있었다. 여기에서 북한은 어떻게 위조 화폐를 취득하였나를 살펴보고자 한다.
서울을 점령한 북한은 한국은행 지하금고에 남아있던 100억 원이 넘는 화폐를 탈취하여 확보하였다.
또한 북한이 진품과 똑같지만 다만 발행 허가를 받지 않은 화폐를 이미 6·25 전쟁 전에 상당량을 확보하고 있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그 전말에 대한 이야기이다.
1945년 8·15 광복 이후 남한에는 수많은 정치세력이 난립하고 있었다. 일제는 간악한 술수로 일제의 권력을 상해 임시정부에 넘겨주지 않고, 이곳저곳 조선의 유수한 인물들에게 정권을 넘겨줄 듯 꼬드겼다.
이에 놀아난 장삼이사 너도나도 정치한다는 단체가 우후죽순으로 난립하게 되었다. 그 숫자가 무려 수백이 넘었다. 이래서 사회 혼란이 극에 달하였다. 이것은 도둑놈이 마당 쓸어 놓고 가는 놈이 없다는 이치와 같은 것이었다.
다만 조선공산당(남로당)은 박헌영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하게 조직적으로 정치세력을 키웠다. 남로당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은행권을 인쇄하던 근택(近澤)빌딩과 그곳의 인쇄 기계를 접수하여 조선정판사로 개칭하고, 남로당의 아지트로 사용하고 있었다.
조선정판사에서는 그동안 지폐를 인쇄한 최고의 인쇄기술로 공산당 기관지인 해방일보와 남로당의 선전물과 삐라등을 인쇄하였다.
1945년 10월 20일, 서울시 소공동 74번지에 있는 근택빌딩 내 조선정판사 사장실에서 사장 박낙종, 서무과장 송언필, 재무과장 박정상, 기술과장 김창선, 평판 기술자 정명환, 창고계 주임 박창근 등이 비밀리에 모여 위조지폐를 인쇄하여 공산당에 제공할 것을 모의하였다. 남한에 공산정권 수립을 위하여 당의 자금 및 선전활동비를 조달하고 아울러 남한 경제를 교란할 목적이었다.
그리하여 그날 오후 7시 공장 종업원들이 퇴근한 뒤 김창선이 인쇄소 평판과장으로 있을 때 절취, 보관하고 있던 100원권 원판(아연판) 등으로 그날 하룻밤 위조지폐 1,200만 원을 인쇄하였다. 그후 위조 지폐 인쇄는 수차례 더 있었다. 총 인쇄 액수는 밝혀지지 않았다.
일제로부터 해방은 되었으나 정부 조직이 없이 미군의 군정 통치를 받고 있을 때라서 당시 조선은행(후일, 한국은행)에는 화폐 관리를 제대로 수행할 인원도 조직도 부실하였다. 근택빌딩 인쇄소에 맡겨졌던 화폐 원판도 회수하지 않았고, 그 원판을 인쇄소의 일개 과장이 훔쳐도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그들은 진본과 동일하게 인쇄된 지폐를 조선공산당 재정부장 이관술에게 제공, 공산당의 활동비로 사용하게 하였다. 그들이 인쇄한 위조지폐는 회수하지 못하였으므로 정확한 액수도 모르고 행방 또한 알 수 없었다.
적어도 이들이 진술한 액수의 몇 배가 북한 김일성의 수중에 들어갔을 거라는 것이 일반적인 추론이다. 1,200만 원이라는 액수도 액수에 따라 형량도 달라지므로 본능적으로 액수를 줄여 자백했으리라고 보는 것이다.
이때 위조지폐라고 한 것은 공식적으로 인쇄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고, 원판으로 인쇄하였으므로 아무도 진위를 가릴 수 없는 진본 100원권 지폐였다.
나중, 체포된 이들은 위조지폐를 공산당 경비와 남로당 활동비는 물론 각종 반정부 운동자금으로 사용하였다고 진술하였다.
당시 남한에서 노동조합을 움직여 태업과 파업을 저지르는 가장 큰 조직이 남로당이었고 그것은 풍부한 자금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전국노동조합평의회(전평)에는 4만명 조합원을 거느린 철도국의 노동조합이 가입하고 있었다.
이 철도 노조가 파업하면 전국의 물류와 교통 수단이 마비되어 산업 전반이 경색될 수밖에 없었다. 철도 노조 파업은 김두한 일대기에도 나오는 일화로 총탄이 난무하는 험악한 파업이었다.
이처럼 조선공산당은 이 위조지폐로 남한 경제를 교란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하였다. 또, 공산당 활동에 자금이 풍부하므로 당원 포섭 자금은 전혀 어려움이 없었고 어느 정치 단체보다 활발한 정치 활동을 하였다.
돈을 찍으면 아무 때나 나오니까 남로당의 박헌영을 비롯한 인쇄소 직원 등이 돈을 펑펑 쓰고 술집에서 새 지폐를 마구 뿌렸다. 이것이 술집 주인의 의심을 사게 되고 이 수상한 지폐 신고를 접한 경찰은 수사에 착수하였다. 경찰은 이 지폐 원판을 서울 오프셋 인쇄소 윤석현이 보관하고 있는 것을 탐지하였다.
즉시 중부경찰서(당시 本町경찰서) 형사대가 범인체포에 나서 1946년 5월 4일과 5일 인쇄공 이재원, 윤석현 등 일당 7명을 체포하고 이어서 나머지 일당을 검거 하였다.
며칠 후 수도청장 장택상과 경무부장 조병옥은 조선정판사사 사장인 박낙종을 비롯하여 그 직원 16명을 체포하였다고 수사결과를 발표하였다.
조선공산당 측에서는 체포된 그들은 공산당원이 아니라고 강변하였고, 매일 시위와 집회를 열고 집단으로 유혈 난동을 부렸다. 이렇게 소란한 가운데 미군 군정청에서는 재판을 진행하여 조선공산당을 불법 정당으로 규정하였고, 해방일보사는 폐간 조치하였다.
남로당원들은 재판과정에서 판사들을 협박하거나 재판정에 난입하여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이러한 소동 가운데 재판은 진행되었고 결국 인쇄소 하급 직원은 최하 10년 징역을 선고받았고, 조선정판사 사장 박낙종을 비롯한 재정부장 이관술, 송언필, 김창선 등 고위직 4명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해방일보사 권오직은 북으로 도주하였고, 남로당의 박헌영도 위조지폐 사건을 계기로 북으로 도망치듯 월북하게 되었다.
만일 이들이 적발되지 않고 남한에 그대로 상주하였었다면 6·25 동란 시 테러와 간첩 활동 등으로 막대한 위협이 되었을 것이다.
이 사건을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이라고 하였다.
북한이 지금까지 저지른 그 숱한 사건 중 어느 하나라도 시인한 적이 없지만, 북한은 조선정판사 위폐사건도 자기들이 지시한 사건이 절대 아니라고 부인하며 현재도 남한의 일부 종북주의자들은 정치적 탄압사건이라고 강변하고 있다.
이때 인쇄된 위조지폐는 거의 회수하지 못하였고 공산당 수중으로 넘어갔다. 당시 압수한 지폐 원판이 6·25 동란 중에 한국은행 지하 금고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6·25 동란 개전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들이 인쇄 원판을 또 다시 탈취하여 새로운 위조지폐를 찍어 내서 남한 경제를 혼란에 빠트리기 시작하였다. 화폐개혁을 하지 않을 수가 없게 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비록 미군의 도움을 받았으나 한국은행권을 발행하여 위조지폐의 유통을 적기에 잘 차단하여 남한 경제의 혼란을 어느 정도 막게 되었다.
또한, UN의 16개국이 공산주의와의 전쟁에 동참하였고, 천우신조로 맥아더 장군의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여 북괴군을 물리친 것이다.
위조지폐 사건 후 조선정판사는 천주 교단에서 매입하여 경향신문을 발행하였고 천주교회에서 쓰는 각종 인쇄물을 인쇄하였다.
전 (사)한국귀금속감정원 회장